과연 한여름의 햇빛은 엄청났다. 뜨겁다 못해 타들어갈 것만 같은 강렬한 햇빛이 머리 바로 위에서 쨍하니 빛났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더웠다.
"더워……. 쪄 죽을 것 같아…."
나를 당장이라도 말려죽일 듯한 열기에 당연스럽게도 내 몸은 착실히 음료 자판기 앞에 섰다. 자판기를 잡고 흔들어 탄산음료를 빼내고 싶어하는 충동스러운 몸을 한 조각 남은 이성으로나마 겨우 붙잡고 겉으로는 차분하게 동전을 기계의 투입구로 집어넣었다. 딸그랑, 하는 맑은 소리가 경쾌하다.
충분한 돈을 넣고 마치 짠 것 마냥 동시에 붉은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거칠 것도 없이 내가 원하던 음료의 버튼을 꾹 눌렀다. 내가 생각해도 매가 자신의 먹잇감을 낚아채는 것 마냥 엄청난 스피드였다.
덜커덩, 탄산음료가 배출구로 나오는 소리가 내 귀를 즐겁게 달군다. 손에 들고 있자니 마치 세상을 전부 얻은 것만 같은 쾌감이 짜릿하게 몸을 타고 올랐다.
서둘러 자판기 옆 그늘에 앉아 캔의 플립을 땄다. 탄산이 밖으로 터져나오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
"푸하—!"
한 모금을 들이키며 탄성을 질렀다. 살 것만 같다. 이게 천국이지, 천국이 따로 있으랴.
우선 나도 여고생이니 차분하게 먹자, 라는 생각은 어느샌가 저 만치 도망가버리고 없어서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캔의 음료는 반이나 없어져 있었다.
"어차피 여기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납득해버린 나는 나머지 반을 꿀꺽꿀꺽 거침없이 해치워버렸다. 정말 탄산음료는 천상의 음식, 아니 축복이다. 그런 생각이나 하며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실제로는 듣지도 못한) 수업이 1교시밖에 하지 않은 덕분에 시간이 널널히 남아버렸다. 오로지 매니저와의 소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지라 곁에 두고 있던 기간도 꽤 김에도 불구하고 낯설디 낯선 전자기기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현재 시각은 9시 반. 촬영은 2시부터이지만 실질적으로는 1시부터 준비를 해야한다고 쳐도 무려 3시간이 넘게 남았다. 그럼 그 동안 무엇을 해야할까. 이럴 때 친구라도 불러서 남는 시간동안 카페에 앉아 수다라도 떨면 좋겠지만, 방송일 때문에 학교에 잘 나가질 못하니 친구가 없었다.
"……집에 가서 잠이나 더 잘까."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느라 지쳤다. 그래, 그래야겠어. 그렇게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무언가를 발견하고 몸이 굳어버렸다.
"이, 이건…!"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겨우 제지하며 눈을 비볐다. 내 시선의 끝은 한 팬시상품 광고지였다. 거기에는 믿을 수 없을만큼 귀여운 팬시가 실려있었다. 그 이름도 「홍연어 스트랩」이라는, 말도 안될 정도로 귀여운 이름이었다. 눈을 내리니 무슨 상품을 겨냥하고 쓴 글일지는 몰라도 '기간 한정!'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좋아. 남는 시간에 이걸 사러 가는거야. 굳게 다짐하며 다 먹은 캔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우선 공중화장실에 들려 교복에서 미리 챙겨온 수수한 사복으로 갈아입고 후드를 푹 눌러썼다.
이 정도면 준비 오케이지! 자신만만하게 외치면서도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골목을 골라서 닌자마냥 조심스럽게 다니다가 마침내 스트랩을 파는 가게가 있는 골목길에 도달했다.
조금만 있으면 그 스트랩이 내 손에 들어온다는 거지? 하고 혼자 흥분해서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골목길에서 뛰쳐나가는 순간—
"—아얏?!"
"뭐예요! 앞 좀 보고 다녀요!"
누군가와 부딪혀 넘어져버렸다. 조그만한 여자아이였다. 꽤나 까칠하고 신경질적인 음성이다. 우선 미안해, 하고 작게 사과하며 일어나 아이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키라던가 덩치를 보아하니 초등학생 쯤 되어보이는 아이였다.
"아으으……. 뭐가 그렇게 급해서…!!"
뭔가 나에게 따져물으려던 아이가 부딪힐 때 후드가 벗겨져 훤히 드러난 얼굴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잠깐만, 후드가 벗겨졌다고? 허겁지겁 후드를 꾹 눌러쓰는데 아니나다를까 여자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저, 저기요, 진짜 키사라기 모모 씨예요?"
역시나. 그나마 아이가 작게 이야기해주었다는 것에 대해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숨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져 한숨을 푹 쉬었다.
"저, 저는 아사히나 히요리예요! 팬이예요 언니!"
아까 신경질적인 태도는 어디에 버렸는지 아주 공손한 태도다. 태도변환이 몹시 빠른 아이였다.
"아, 저기, 아사히나 양?"
"히요리라고 불러도 상관 없는데."
다짜고짜 요비스테를 요청당했다. 히요리라고 부르지 않으면 절대로 대답을 해 주지 않을 것만 같은 모습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에, 그러니까 히요리."
"네?"
"나는 얼른 저기 가게에서 스트랩을 사고 돌아가야 하거든……. 음, 그러니까…."
"사인이라던가, 사진 한 번만 찍어주시는 것도 안 되요?"
안쓰럽게 올려다보는 눈초리가 꽤나 아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획사의 방침에도 사석에서 그러한 행위를 하는 건 엄히 금지하고 있으니 무리다.
다행히도 히요리는 꽤나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곤란한 기색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더니 금세 알아서 단념해 준 것이다. 하지만 풀이 잔뜩 죽은 모양이라서 어쩐지 미안해졌다. 아, 그렇지…!
"그, 그럼 히요리. 메일이라도 교환할래? 물론 남에게 퍼뜨리지 않는다는 전제에 한해서."
기획사에서 확실히 전화번호라던가, 그런 건 엄격하게 제지했지만 메일주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나 제의했더니 히요리의 표정이 살아났다.
"네! 교환할래요!"
무척이나 기쁜 얼굴로 내 메일 번호를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하고 자신의 메일을 넘겨주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괜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인사를 한 뒤 좋아하는 히요리를 뒤로 하고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정확히는 옮기려고 '했다'.
"무, 뭐야……!"
—눈치 채지 못한 사이 엄청난 사람들의 무리에게 우리 두 명은 둘러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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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 ミネ
그림쟁이 인 척 하는 평범한 잡덕 글쟁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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