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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나비'를 받고 간단하게 연성해본 글입니다.

 

***

 

 

어느 날의 봄, 꽃에 나비가 날아들 듯 나는 너에게 날아들었다.

 

*

 

첫 만남은 다시는 떠올리기 싫을 만큼 최악이었다. 비틀거리던 발걸음, 잔뜩 술에 취해 어렴풋한 시야, 그에 반해 어느 때보다도 들떴던 기분. 무엇이 문제였을까, 고민해보자면 사실 이 모든 것들이 문제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무엇이 문제였냐면 완전히 초면인 네 품으로 뛰어들었던 내가 제일 문제였다. 남자친구였던 놈을 걷어차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그 놈의 욕을 마구 퍼붓다가 나와선, 히히덕거리며 길거리를 걷다가 널 보곤 그냥 네 품 속으로 달려가버린 내가.

그 때의 난 도대체 어떤 정신으로 네게 안긴걸까. 아직도 제대로 기억난다. 명백하게 당황하고 곤혹스러워하던 너의 표정.

네 얼굴을 보고 나서야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차가워지는 이성으로 황급히 떨어져 잔뜩 꼬인 발음으로 꾸벅꾸벅 사과를 건네는 내게 너는 조심스레 물었다.

 

, 저기. 괜찮아요?”

 

첫 질문부터 배려심이 뚝뚝 흘러넘치는 너의 첫마디에 내 눈물도 뚝뚝 흘러넘쳤다. 아니, 사실은 그 반응이 매우 정상적이고 당연하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전 남자가 너무 쓰레기였기에 그런 당연한 반응이 너무 고맙고 서글펐다.

급기야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나에게 너는 어찌 했더라. 안타깝게도 그건 기억이 나질 않는다. 눈물이 터짐과 동시에 술에 잔뜩 절여진 뇌가 필름을 뚝 끊어버린 탓이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땐 이미 집이었다. 너의 모습을 안개 속 넘어로 간신히 떠올린 나는 창백해져 우선 내 몸가짐과 짐들을 확인해보았다. 어제 입고 널부러져 잔 탓인지 마구 구겨진 정장과 딱 택시비만큼 돈이 사라진 자신의 지갑. 그리고 급하게 편의점에서 산 모양인지 완전히 빳빳한 노란 포스트잇 쪽지가 한 장.

 

집을 알기 위해서 잠시 신분증 좀 봤어요, 미안. 일부러 여자 택시기사님 불렀으니까 무사히 들어갔다고 여기로 한 마디만 해줘요.’

 

연락처도 아니고, 이메일 주소가 적힌 쪽지를 보며 괜스레 웃음이 터져나왔다. 참 된 사람이다, 그게 멀쩡한 정신을 찾은 내가 가장 먼저 든 소감이었다.

 

푸훗, 푸하핫,”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그리고 눈물도. 당신같은 사람이 내 애인이었다면 지금 나는 이렇게 마음이 아프진 않았을텐데. 웃음과 울음을 같이 터뜨린 나는 한동안 메마른 집 안에서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

 

두 번째 만남은 의외로 금방이었다. 이메일로 안부를 전하고 난 뒤, 그것을 인연으로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 받다가 둘 다 다시 얼굴을 보자고 약속을 한 탓이었다.

평소보다 더 공을 들여 머리를 꾸미고, 화장을 하고 난 뒤 두근거리는 마음을 끌어안고 만나기로 한 카페에 미리 가서 앉아있었다. 너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발견하고 싶어서, 일부러 유리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나는 순간 눈을 일그러뜨렸다.

그 놈이랑 눈을 마주친 탓이었다. 내 남자친구를 자처하던 미친 쓰레기놈. 그 녀석도 날 발견한 모양인지 히죽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이게 누구야, 도도하고 도도하신 내 여자친구분이 아니신가.”

난 너랑 할 말 없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즐겁게 뛰어오르던 심장이 차갑게 식어내렸다.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커피만 마시는 내 모습에 놈은 열이 뻗쳤는지 뭐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다가 내 멱살을 휘어잡았다.

 

뭐하는거야!”

뭐하긴, 내 여친 놈 기강 잡지.”

 

미쳤다 미쳤다 했더니 정말로 정신이 나간건지 얼굴이 새빨개져 씩씩거리는 놈의 얼굴에 침을 뱉어줄까 하다가 나는 순간 표정이 희게 질렸다. 네가 내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앞에서 침을 튀기도록 뭐라뭐라 열변을 토하는 것은 들리지도 않았다. 너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유리벽 넘어에서 나와 놈을 바라보고 있었다.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너의 모습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참 남자운도 없지. 이딴 쓰레기 때문에 좋은 사람처럼 보이던 너를 이렇게 놓치게 되다니. 이런 내게 네가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여전히 내 멱살을 잡고 있던 놈의 팔목을 강하게 부여잡는 너의 팔에 깜짝 놀랐다.

부예진 시야 사이로 단단히 화가 난 듯 입가를 굳게 다물며 놈을 노려보는 네가 보였다.

 

, 뭐야?”

뭐하시는 겁니까?”

 

잠시 당황하던 놈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턱짓했다. 3자가 상관하지 말고 저리로 가란 뜻이었을까. 그러나 너는 놈의 기대를 무시해버린 채 우선 내 멱살에 붙은 놈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지금 뭐하시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시발, 니놈이 신경 쓸 일이 아니잖아!”

신경 쓸 일입니다. 그 쪽 여자분, 오늘 제가 만나기로 했거든요.”

 

너는 한 마디도 지지 않은 채 강하게 맞섰다. 몇 번이고 말에 밀리던 놈은 마치 최후의 보루마냥 당당하게 나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이 년은 내 여친이라고!”

 

정말 한심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눈물이 쏙 들어간 눈을 들자 그래서 어쩌라는 듯한 표정을 지은 네가 보였다. 그런 표정에 힘 입어 나 역시 입꼬리를 차게 올렸다.

 

정확히는 여자친구겠지.”

?”

, 차였잖아. 몇 주전에. 나한테. 아주 처절하게.”

 

가랑이 사이까지 차였지, 아마. 비아냥거리는 내 말투에 가뜩이나 시뻘겋던 네 얼굴이 마치 활화산마냥 달아올랐다. 내게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듯한 네 모습에 너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피식 웃어보였다.

 

집착하는 사람이 제일 매력없다던데. 알아요?”

어머, 그러게요. 저 사람, 멍청해서 그런 거 모르거든요.”

 

말을 끝내는 순간, 놈은 내게 주먹을 날렸다. 결국 참지 못한 걸까.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얼굴을 보호하던 나는 아픔이 찾아오지 않자 의아한 마음에 빼곰 눈을 들었다.

보이는 광경은 놀라웠다. 나름 순하게 보였던 네가 놈의 팔을 잡아 힘으로 저지한 것이다. 전 여자친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놈의 무식한 힘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던 나는 무척 놀라 널 올려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비웃듯 조금 올라가있던 입매는 마치 처음처럼 굳게 다물려있었다.

잠시 당황하는 놈과 자신의 손에 잡힌 놈의 팔을 번갈아 보던 너의 입에서는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마냥 낮디 낮은 저음이 신음마냥 새어나왔다.

 

“...내 여자야. 어딜 손을 대려고 해?”

, ? 무슨 개소리야!”

네가 놓친 이 좋은 사람, 내가 데려간다고. 어딜 손을 대려고 해?”

 

경찰 불러서 하나하나 파묻어 버리기 전에, 당장 꺼져. 위협하는 목소리로 이를 가는 너의 모습에 놈은 다음에 부고보자, 라는 흔한 말을 던지고는 꽁무니 빼게 도망가버렸다.

이제야 밀려오는 부끄러움과 긴장감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좋아하던 카페였는데, 다시는 오지 못할 것 같다. 완전히 쭈그려 앉아 얼굴을 숨기고 있던 나를 바라보던 너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괜찮아요?”

 

그 때와 대사도 같았다. 이 미묘한 데자뷰에 괜스레 터져나오는 헛웃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나를 너는 어찌 보고 있을까.

 

“...괜찮으니까, 얼굴 보여주세요. 다친 곳은 없어요?”

 

부드럽게 말하며 내 옆에 같이 앉는 너의 행동에 나는 고개를 들면서도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다시피, 괜찮아요. 힘 없이 내뱉어진 내 말에 그저 날 도닥이던 너는 문득 무엇을 떠올린 건지 당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 아니. 아까 제 멋대로 제 여자라고 말했는데... ,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잔뜩 얼굴이 빨개져 급하게 말을 잇는 너의 모습에 이번에는 유쾌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어쩜 사람이 이렇게 간사할까. 너의 모습 하나만으로 이렇게 행동해졌다. 나는 작게 눈웃음을 지으며 너의 손을 덥썩 잡았다.

 

우리, 그걸 실제로 만들어보는 건 어때요?”

, ?”

사귀고 싶어요, 당신이랑.”

 

잠시 침묵하던 너는 아까의 호승심 어린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누구보다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는 나비는 너라는 꽃에게 그렇게 날아들었다.


WRITTEN BY
ミネ
그림쟁이 인 척 하는 평범한 잡덕 글쟁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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ミ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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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틀거리며 노을 진 거리를 걸어 나갔다. 한 쪽 다리는 두터운 기브스, 한 쪽 팔은 멍청하게 묶인 붕대와 목발, 머리 전체를 휘감고도 모자라서 한 쪽 눈까지 덮어버린 붕대. 현재의 내 꼴이었다.

 

“아파......”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홀로 중얼거리며 위태롭게 걸어갔다. 형제들에게, 내 ‘사랑스러운’ 형제들에게 가자. 그러기만 한다면 이 아픔도 어느 정도는 가시리라. 그 때의 나는 그렇게 믿었다.

 

걸음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비틀비틀. 익숙하지 않은 목발을 짚는 것이 거슬렸다. 집어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든 꾹 참은 채 열심히 걸어 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

 

어쩐지 집으로 가는 공터 쪽이 시끌벅적했다. 이 늦은 시간에, 도대체 누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아니, 사실은 약간의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내가 아는, 익숙한 목소리들이 섞여 있었기에,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 내 형제들이 나를 마중 나온 것은 아닐까 하고.

 

...그리고 그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내가 없는 그들의 행복한 모습이었다. 순간 모든 환상이, 현실이, ...내가 깨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들로 인해 이렇게 엉망진창인 모습이 되었는데도, 어째서 내가 빠진 그들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도 훈훈하고 정다워 보이는가.

 

그것은 미치도록 견딜 수 없는 광경이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친구가 없어도 가족이 있으니 괜찮다고. 그 ‘가족’의 틀 안에는, 내가 없었다. 나는, 아아, 나는. 욱신거리는 한 쪽 눈을 부여잡았다. 그들이 던진 물건 중 하나에 맞아서 붕대 속에 잠들어버린 눈이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꼴이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지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왔는데. 어째서 너희들은 나를 돌아봐주지 않는 것인가. 내가 없는 세계에서 그렇게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인가.

 

어쩐지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소리를 높여 너희들을 부를 수조차 없었다. 내가 너희를 부르는 순간, 그 ‘완벽한 행복’이 깨져나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 와중에도 내가 너희들의 행복을 깨부순다는 행위가 미칠 듯이 싫어서.

 

결국 나는 너희들의 뒷모습이 마치 선혈마냥 붉게 달아오른 노을을 넘어 어둑한 그림자마저 사라져갈 때 즈음에 겨우 입을 열었다.

 

“취급이, 전혀 달라...”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얼굴의 반을 덮은 붕대가 애처롭게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끝내 흐느끼지 않았다. 내가 비참하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안 된다고, 분명 그들은 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의 그들의 ‘행복’에 나를 끼워주지 못한 것이라고. 그렇게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그것이 결국 내게 독이 되어 돌아오리란 것을 희미하게 느꼈으면서도. 바보 같이.

 

겨우겨우 엉망진창이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노을은 물론이요 달마저 구름 뒤로 숨어버린 늦은 저녁이었다. 붕대투성이가 된 손으로 힘겹게 집 문을 따고 들어서자 나를 반긴 건 다름 아닌 불 꺼진 현관이었다. 그래, 다들 피곤했을 거야.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 같으니까, 그리고 지금 밤이 무척이나 늦었으니까. 그래서 다들 자러 간 것이구나. 하지만 나 정도는 조금만 기다려 주었어도 괜찮았잖아. 홀로 납득하면서도 조금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형제들 사이에서 그들의 온기를 느끼며 잠에 들자. 그러면, 지금의 기분은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겨우겨우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섰다. 이제, 형제들에게만 간다면. 그래서 이치마츠와 토도마츠 사이에 끼어서 잠이 들 수만 있다면.그렇다면 이 아픔도 어느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 않을까.

 

...크나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망연한 표정으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이 다리로, 이 목발을 짚고, 올라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평소 잘만 오르내리던 계단이 지금의 나에게는 결코 오를 수 없는 가파른 절벽마냥 느껴졌다.

 

어쩔 수 없는 서러움이 또다시 눈물의 형태로 나를 뒤덮었다. 아파, 아파, 아파. 아까서부터 참고 참아왔던 고통이 한순간 물밀 듯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악, 하고 무너져 내리면서도 미련한 형제애가, 가족들을 향한 사랑이 그들이 깨지 않도록 비명을 억눌러냈다.

 

이 멍청한 녀석아, 그 와중에도 너는 그들을 생각하고 있어? 너를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누군가가 고통에 입술을 깨무는 나를 조롱하며 비웃었다. 그러게, 그러네. 나는 언제나 배려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것이 몸에 배어서 그러하였나. 허탈함에 웃음이 잇새사이로 새어나왔다.

 

“하하....”

 

내가 처량하고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날 밤을 현관에 쭈그려 앉아 일찍 일어난 어머니에게 발견될 때까지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

 

엉망진창이 되어서 돌아온 나를 대하는 형제들의 태도는 생각보다 더 차가웠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 장본인이라는 것을 아예 잊어버린 쥬시마츠와 토도마츠는 둘 째 치고, 나를 이렇게 만드는데 가장 공헌한 맷돌을 집어던진 이치마츠는 오히려 ‘죽어버리지 왜 살아 돌아왔냐’는 말도 안 되는 독설을 퍼부은 채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불쾌한 안색으로 나가버렸다. 뒤에서 왜 그러느냐며 그를 혼내는 쵸로마츠의 목소리도, 나를 슬슬 웃으며 달래는 오소마츠의 목소리도 전부 내게 와 닿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서 맴도는 건 이치마츠의 그 말 한 마디 뿐.

 

왜 죽어버리지 않았냐고? 그러게. 나는 도대체 뭘 위해서 너희들이 준 상처를 온 몸에 안고도 이렇게 꾸역꾸역 살아서, 그래도 너희를 사랑하니까 보러오겠답시고 이 집구석에 돌아온 걸까. 너희는 어떠한 나라도 똑바로 쳐다봐 주질 않는데.

 

“어이, 카라마츠? 지금 형아 말 씹는 거?”

“미, 미안하다. 못 들었군. 뭐라고 그랬나, 형님?”

 

순간 내 어깨를 슬쩍 흔들며 나를 부르는 오소마츠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흐릿해진 눈을 들어 오소마츠를 바라보았더니 어쩐지 흠칫 놀라던 그는 곧 평소의 마이페이스를 되찾으며 씩 웃었다.

 

“이치마츠 말은 너무 속에 담아두지 말라구.”

“......아아.”

 

뭐, 그리고 죽으라는 말은 언제나 듣던 말이었잖아? 그니까 신경도 안 쓰이지? 하나뿐인 형은 웃으며 그렇게 마음에 대못을 박으며 나갔다. 항상 듣는 말이기 때문에 더더욱 아플 것이라는 건 생각도 못 해주는 건가.

 

배려심이 없는 것은 너나 이치마츠나 똑같다, 이 잔인한 녀석아. 그리 생각하며 그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릿하게 피 내음이 배어나왔다. 문득 울고 싶어졌다.

 

*

 

오른쪽 눈의 소생은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이주 후, 상처를 다시 한 번 정밀 검사하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들은 의사 선생의 선고 아닌 선고에 눈앞이 파래지는 것만 같았다. 평생 지울 수 없는 흉터를 안긴 토도마츠의 꽃병조각은 아무래도 나에게 영원한 어둠마저 안긴 모양이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건가요.”

“외상 적으로는 마츠노 씨도 알다시피 그 흉터가 남겠고,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오른쪽 눈의 실명을 제외하고도 오른팔 역시 사용이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전에 그 지독한 상처에 비하면 후유증은 생각보단 적은 편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혀를 쯧쯧 차는 의사 선생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후유증이 적은 편이라고. 하하하, 마른 웃음이 저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당신이 보기엔 다행인거지만, 제 입장에서는 어느 때보다도 가장 흉하고 아픈 상처입니다.

 

그랬다. 그 누가, 형제들 때문에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겠는가. 힘없이 의사 선생에게 인사를 꾸벅 해보이고 병원을 나서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형제들에게 버림 받았다. 아아, 그렇고말고. 이것만큼 지금 나에게 가장 맞는 표현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예전부터 지겹도록 들었던 [여섯이서 하나, 하나로 여섯]이라는 말버릇이 산산조각으로 엉망진창 깨어졌다. 그래, 나는 이제 ‘육분의 일’이 아닌 ‘하나’인거야. 다시는 그 분수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버린 단절면을 가진 하잘 것 없는 파편. 그게 나인거야.

 

나는 언제서부터 ‘괜찮’지 않았더라. 지금껏 내가 공허하게 그들에게 뱉어온 ‘괜찮아’라는 말들이 마치 메아리처럼 심장을 찔러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집으로 돌아간다. 분명 돌아가면 여전히 일상이라는 그런 잔인한 위상으로 나를 찔러댈테지. 하지만 이제는 나도 몰라. 이미 만신창이다. 더 이상 죽을 곳은 없어. 그 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와장창!

 

유리컵이 깨지는 소리가 거칠게 귀를 때렸다. 형제들이 나를 연달아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귀를 타고 넘어왔다. 카라마츠! 진정해! 유리조각 밟지 않도록 움직이지 마! 솔직하게 말하자면 하나도 내게 닿지 않았다. 넘어가기 직전인 숨을 겨우 진정시키며 파랗게 질린 그들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목발 없이 바닥에 지지되어진 왼발이 지끈지끈 고통을 호소했지만 가슴을 사납게 쥐어뜯는 고통이 더 심했으므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쓰지 못했다. 이젠 한계였다.

 

“너희들..., 너희들은, 어째서! 어째서 날 항상 비참하게 만드는 건가!!”

 

지금껏 마음에 담아왔던 그 질문이 거칠게 성대를 할퀴고 튀어나왔다. 이젠 싫다. 어째서 나만, 이런 역할을 맡아야만 하는 것인가. 어째서 너희들은 나를. 대답 없는 의문만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

 

형제들에게 분노를 토하고 돌아온 손님방은 여느 때보다도 어둡고 차가웠다. 터덜터덜 너덜한 몸을 이끌고 구석으로 들어간 나는 몸을 끌어안았다. 비참하다. 비참해도 이렇게 비참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힘껏 참아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날, 황혼 속에서 그들을 본 이후로 처음 흘리는 눈물이었다. 멍하니 바닥으로 방울져 떨어지는 눈물을 보다가 다리 속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화를 낸다면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를 봐주고, 진심으로 사과하길 바랐다. 기대했었다. 그런 기대감을 와중에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래, 그것은 단지 기대에 불과했다. 형제들은, 나를 봐주기는커녕 내가 어째서 화를 내고 있는지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그저 공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꼴사납구나, 카라마츠. 왜 스스로를 부술 선택지를 골랐어? 아직도, 그들에게 미련이 남았어? 그 녀석들이, 너에게 조그마한 관심 조각 하나라도 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어? 육분의 일에서 떨어져나간 너에게? 배의 가치보다 아래인 녀석에게?

 

덜덜 떨리는 오른 팔을 들어 아직 붕대에 갇힌 오른 눈을 지그시 눌렀다. 죽을 뻔하고,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처와 장애를 얻은 시점에서부터 사실 나는 그들을 믿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작은 미련이 자꾸만 나를 붙잡았다. 어릴 적 같이 뛰놀았던 기억들이 족쇄가 되어 나를 얽어매고 있었다.

 

“힘들어...”

 

지금껏 말로 내뱉지 못했던 진심을 입에 담았다.

 

“...아파.”

 

지금껏 들어오기만 하고 결코 응석 부리지 못했던 아픔을 입에 담았다.

 

“아프다.”

 

언제나 흐릿했던 말이 순간 또렷하게 다가왔다. 그래, 나는 항상 아팠다. 멋있다고 생각했던 모습은 언제나 전력으로 거부당했고 말 뿐만이 아닌 그 안에 담겼던 진심조차 언제나 묵살 당했다. 그런 내가 아프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형제들에게 드러내면 분명 미움 받는다는 그런 무의식이 고통을 표현하기는커녕 느끼는 것조차 막아왔던 것이다.

 

깨닫고 보니 알겠다. 이미 나는 그 전부터 산산조각 나 있었다. 이번을 계기로 필사적으로 붙여왔던 그 파편들이 기어코 떨어져 나온 것일 뿐, 나는 이미 깨져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깨달은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 더 이상은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다시는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츠노 카라마츠로 돌아갈 수 없는데. 형제들이 살아가는 이유였던 마츠노 카라마츠는, 이제 결코 살아 돌아올 수 없는데.

 

저기, 나는 어떻게 해야 해? 허공으로 내뱉어진 질문이 덧없이 공기 중으로 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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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ミネ
그림쟁이 인 척 하는 평범한 잡덕 글쟁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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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ze(7)

[카게프로]Haze 2016. 12. 9. 21:26

과연 한여름의 햇빛은 엄청났다. 뜨겁다 못해 타들어갈 것만 같은 강렬한 햇빛이 머리 바로 위에서 쨍하니 빛났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더웠다.

 "더워……. 쪄 죽을 것 같아…."

나를 당장이라도 말려죽일 듯한 열기에 당연스럽게도 내 몸은 착실히 음료 자판기 앞에 섰다.  자판기를 잡고 흔들어 탄산음료를 빼내고 싶어하는 충동스러운 몸을 한 조각 남은 이성으로나마 겨우 붙잡고 겉으로는 차분하게 동전을 기계의 투입구로 집어넣었다. 딸그랑, 하는 맑은 소리가 경쾌하다.

충분한 돈을 넣고 마치 짠 것 마냥 동시에 붉은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거칠 것도 없이 내가 원하던 음료의 버튼을 꾹 눌렀다. 내가 생각해도 매가 자신의 먹잇감을 낚아채는 것 마냥 엄청난 스피드였다.

덜커덩, 탄산음료가 배출구로 나오는 소리가 내 귀를 즐겁게 달군다. 손에 들고 있자니 마치 세상을 전부 얻은 것만 같은 쾌감이 짜릿하게 몸을 타고 올랐다.

서둘러 자판기 옆 그늘에 앉아 캔의 플립을 땄다. 탄산이 밖으로 터져나오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

 "푸하—!"

한 모금을 들이키며 탄성을 질렀다. 살 것만 같다. 이게 천국이지, 천국이 따로 있으랴.

우선 나도 여고생이니 차분하게 먹자, 라는 생각은 어느샌가 저 만치 도망가버리고 없어서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캔의 음료는 반이나 없어져 있었다.

 "어차피 여기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납득해버린 나는 나머지 반을 꿀꺽꿀꺽 거침없이 해치워버렸다. 정말 탄산음료는 천상의 음식, 아니 축복이다. 그런 생각이나 하며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실제로는 듣지도 못한) 수업이 1교시밖에 하지 않은 덕분에 시간이 널널히 남아버렸다. 오로지 매니저와의 소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지라 곁에 두고 있던 기간도 꽤 김에도 불구하고 낯설디 낯선 전자기기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현재 시각은 9시 반. 촬영은 2시부터이지만 실질적으로는 1시부터 준비를 해야한다고 쳐도 무려 3시간이 넘게 남았다. 그럼 그 동안 무엇을 해야할까. 이럴 때 친구라도 불러서 남는 시간동안 카페에 앉아 수다라도 떨면 좋겠지만, 방송일 때문에 학교에 잘 나가질 못하니 친구가 없었다.

 "……집에 가서 잠이나 더 잘까."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느라 지쳤다. 그래, 그래야겠어. 그렇게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무언가를 발견하고 몸이 굳어버렸다.

 "이, 이건…!"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겨우 제지하며 눈을 비볐다. 내 시선의 끝은 한 팬시상품 광고지였다. 거기에는 믿을 수 없을만큼 귀여운 팬시가 실려있었다. 그 이름도 「홍연어 스트랩」이라는, 말도 안될 정도로 귀여운 이름이었다. 눈을 내리니 무슨 상품을 겨냥하고 쓴 글일지는 몰라도 '기간 한정!'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좋아. 남는 시간에 이걸 사러 가는거야. 굳게 다짐하며 다 먹은 캔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우선 공중화장실에 들려 교복에서 미리 챙겨온 수수한 사복으로 갈아입고 후드를 푹 눌러썼다.

이 정도면 준비 오케이지! 자신만만하게 외치면서도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골목을 골라서 닌자마냥 조심스럽게 다니다가 마침내 스트랩을 파는 가게가 있는 골목길에 도달했다.

조금만 있으면 그 스트랩이 내 손에 들어온다는 거지? 하고 혼자 흥분해서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골목길에서 뛰쳐나가는 순간—

 "—아얏?!"
 "뭐예요! 앞 좀 보고 다녀요!"

누군가와 부딪혀 넘어져버렸다. 조그만한 여자아이였다. 꽤나 까칠하고 신경질적인 음성이다. 우선 미안해, 하고 작게 사과하며 일어나 아이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키라던가 덩치를 보아하니 초등학생 쯤 되어보이는 아이였다.

 "아으으……. 뭐가 그렇게 급해서…!!"

뭔가 나에게 따져물으려던 아이가 부딪힐 때 후드가 벗겨져 훤히 드러난 얼굴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잠깐만, 후드가 벗겨졌다고? 허겁지겁 후드를 꾹 눌러쓰는데 아니나다를까 여자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저, 저기요, 진짜 키사라기 모모 씨예요?"

역시나. 그나마 아이가 작게 이야기해주었다는 것에 대해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숨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져 한숨을 푹 쉬었다.

 "저, 저는 아사히나 히요리예요! 팬이예요 언니!"

아까 신경질적인 태도는 어디에 버렸는지 아주 공손한 태도다. 태도변환이 몹시 빠른 아이였다.

 "아, 저기, 아사히나 양?"
 "히요리라고 불러도 상관 없는데."

다짜고짜 요비스테를 요청당했다. 히요리라고 부르지 않으면 절대로 대답을 해 주지 않을 것만 같은 모습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에, 그러니까 히요리."
 "네?"
 "나는 얼른 저기 가게에서 스트랩을 사고 돌아가야 하거든……. 음, 그러니까…."
 "사인이라던가, 사진 한 번만 찍어주시는 것도 안 되요?"

안쓰럽게 올려다보는 눈초리가 꽤나 아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획사의 방침에도 사석에서 그러한 행위를 하는 건 엄히 금지하고 있으니 무리다.

다행히도 히요리는 꽤나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곤란한 기색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더니 금세 알아서 단념해 준 것이다. 하지만 풀이 잔뜩 죽은 모양이라서 어쩐지 미안해졌다. 아, 그렇지…!

 "그, 그럼 히요리. 메일이라도 교환할래? 물론 남에게 퍼뜨리지 않는다는 전제에 한해서."

기획사에서 확실히 전화번호라던가, 그런 건 엄격하게 제지했지만 메일주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나 제의했더니 히요리의 표정이 살아났다.

 "네! 교환할래요!"

무척이나 기쁜 얼굴로 내 메일 번호를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하고 자신의 메일을 넘겨주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괜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인사를 한 뒤 좋아하는 히요리를 뒤로 하고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정확히는 옮기려고 '했다'.

 "무, 뭐야……!"

—눈치 채지 못한 사이 엄청난 사람들의 무리에게 우리 두 명은 둘러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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ミ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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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ze(6)

[카게프로]Haze 2016. 12. 9. 21:25

SIDE IN Momo Kisaragi

 "멍청한 놈……."

옆에서 키도 씨가 나즈막히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키도 씨의 「능력」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고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해서 몸을 조금 더 바짝 웅크렸다(사실은 키도 씨가 무서웠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지만).

 "마, 마리, 뭐하는 거야?"
 "무기! 싸울거야!"

그 와중에 샤워기의 머리 부분을 나름대로 위협적으로 휘두르려고 노력하는 마리를 허탈하게 바라보며 나는 지금까지의 일을 떠올렸다.

*

오늘도 평소와 같이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분명 원래 등교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온갖 사람들의 인사 덕분에 1교시를 말끔하게 날려먹은 대지각. 아, 그래 내가 원래 그렇지 뭐—하고 투덜거리기에는 지친다. 내가 지각을 하는 것은 이미 학교 내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그나마의 위안이랄까, 사실은 더 우울하다. 나도 제 시간에 맞춰서 학교 오고 싶다고.

그나저나 큰일이다. 가뜩이나 성적도, 출석도 모자라서 보충까지 받으러 왔으면서 또 지각이다. 이건 전부 다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내 노래 때문이다. 가뜩이나 새 앨범이 나오는 날이다보니 더더욱 심한 편이었다. 곳곳에는 프릴에 파묻혀 죽을 것 같은 옷을 입고 상큼하게 웃고 있는 내 포스터가 널려 있어 분명 더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하아, 이젠 지친다……."

연예인이니, 아이돌이니 이젠 전부 싫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급히 신발장에서 실내화를 꺼내 신었다. 그리고 몸을 돌린 순간—

 "—아얏?!"

뭔가 딱딱한 것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얻어맞았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내 머리를 때린 것으로 추정되는 출석부를 손에 들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백의의 남성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내 담임, 타테야마 켄지로다.

 "아, 아하핫……. 아, 안녕하세요?"
 "나는 안녕하다만, 네 출석률은 안녕하지 못하구나."

출석부를 휙휙 위아래로 흔들며 말하는 담임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나저나 오늘 1교시가 담임이라는 걸 까먹고 있었던 나는 역시 바보인걸까.

 "어이, 이젠 지각한 걸로는 그다지 뭐라 할 생각은 없거든? 그것보단 나는 '이것'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의문을 품었더니 담임은 아무 말 없이 출석부에서 어떤 종이를 나에게 건넸다. 뭐지, 하고 받아들은 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을 느꼈다.

 "거, 거짓말…!"
 "아니,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종이가 들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나를 담임은 짜게 식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손에 들린 종이는 저번주에 본 생물 시험지였다. 2주동안이나 보충을 받고 이젠 할 수 있어—! 하고 전쟁에서 이긴 개선장군마냥 당당하게 본 시험지의 결과물이 이렇게 되어 돌아오게 될 지는 몰랐다.

 "너 말이다……. 우선 글씨가 비뚤배뚤 엉망진창이라는 건 넘어간다 치더라도, 그 점수는……. 아, 그거냐? 2주 보충 받고 2점 받았으니 100주 보충 받으면 100점이냐?"

담임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귀를 타고 넘어왔다. 그 말에 뭐라고 할 수 없음을 분하게 느끼며 나는 다시 시험지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분명 답은 빈칸은 커녕 답안지 칸이 모자랄 정도로 빽빽하게 적어내었는데,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어쩐지 억울하다.

 "고, 공부 열심히 했는데……."
 "뭐라고? 내 귀가 잘못된거냐? 공부한 거라고?! 아니, 너 애초에 '포유류로 분류되는 동물을 한 종류 들어라'라는 문제에 답이 '게, 연어'라니 뭘 공부한거냐고?!"
 "사, 사실은 곰, 사슴이랑 걔네랑 고민하다가 쓴 건데요……."
 "그게 답이잖아! 그보다 한 종류라고 분명히 쓰여 있는데 왜 짝으로 나오는거냐고!"
 "네? 하지만 혼자는 외롭잖아요!"
 "쓸 데 없는 동정심 발휘하지 마!"

사정없이 머리를 때리는 출석부와 무섭도록 밀려오는 담임의 딴죽을 들으며 나는 다시 시험지를 봤다. 아직도 모르겠다는 것이 이렇게 분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면 오빠가 그리워진다. 내 오빠는 나와는 완전히 다르게 어렸을 적부터 몹시 똑똑해서, 받아오는 시험지가 100점이 아닐 때가 없었다.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이런 문제쯤은 가르쳐달라고 했을텐데.

오빠는 2년 전,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다. 엄마는 오빠가 살아있다고 믿고 싶으신 모양이지만 냉철한 나는 이 쯤되면 오빠는 죽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고 싶지 않은 아이돌을 하고 있는 이유도 전부 오빠 때문이다. 오빠가 사라지고나서 가뜩이나 몸이 약하신 엄마는 쓰러졌고 돈을 벌기 위해 이 한 몸을 바친 것이다. 내 청춘을 돈 버는데 바치다니, 이 얼마나 희생정신이 넘쳐나는 인간이란 말인가.

—이러한 생각이나 하며 현실도피를 하고 있자니 담임의 필살 출석부 강타가 다시 한 번 날아들었다.

 "아야!"
 "너, 딴 생각이나 하고 있고 말이야. 어쨌던 이만 가 봐."
 "네?"
 "시간표 안 보냐? 오늘 보충은 1교시밖에 없었다고."

담임이 팔랑거리며 보여준 시간표는 확실히 1교시밖에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시간표를 보지 않고 다닌다는 사실이 이렇게 드러날 줄은 몰랐다.

힘없이 인사를 꾸벅 하며 실내화를 다시 갈아신자니 담임은 오봉에도 수고한다며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다시 안 쪽으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내가 올 때 쯔음에 일부러 여기까지 나온 모양이었다.

 "아아, 진짜 싫다……."

이 시험지를 어떻게 엄마한테 보여드리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여름의 햇빛 밑으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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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ze(5)

[카게프로]Haze 2016. 12. 9. 21:25

한참을 말을 걸고 기다려봐도 나오지 않는 키시 녀석을 내버려두고 발걸음을 돌려 직원이 알려준 방향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윽?!"

기세 좋게 몸을 돌리자마자 누군가와 부딪혀 넘어져버렸다. 이 정도로 욱씬거리는 히키니트의 몸을 한탄하며 일어나 부딪힌 상대를 찾다가 문득 몸이 굳었다. 사나운 눈매의 남자아이. 한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푹 후드를 뒤집어 썼지만 그 사이로 나를 매섭게 쏘아보는 눈빛이 느껴져온다. 우와, 우와아—이러다가 살해당할거야! 필사적으로 몸을 90°로 숙여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아!"
 "……별로. 괜찮아. 미안하군."

어? 생각보다 쉽게 살아남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던 나는 다시 굳었다. 방금 부딪혔던 아이가 마치 증발한 것처럼 사라진 탓이었다.
여기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그 잠깐 사이에 사람들 사이로 사라질 수 있을 정도로 붐비지는 않았고 몸을 숨길만한 방패막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무, 뭐야? 귀신? 아까 그 사람같지 않은 차가운 눈빛도 그렇고, —지금 나는 귀신이랑 부딪히고 사과한 건가?!

패닉상태에 빠진 내 귀를 타고 뾰로통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아?]
 "어, 응? 뭐라고?"
 [괜찮냐고 물었는데.]

뭐야, 이 녀석. 갑자기 친절해졌다. 아직까지도 약간 삐진 목소리이긴 하지만 상냥하게 괜찮냐고 물어오는 키시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툭 내뱉고 말았다.

 "어라? 너 아직 있었어?  사라졌다고만…, 아."

말하는 도중에 점점 얼굴이 머리카락마냥 빨개지는 녀석을 보며 말을 중단했다. 위험해. 이 녀석이 엄청나게 분노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보게 된다면 나에게는 무척이나 재미없는 현상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 쯤은 굳이 미래상을 그려보지 않아도 뻔히 보이는 일이다. 키시 녀석을 달래기 위해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던 나는 결국 무리수를 던지고 말았다.

 "—아! 그, 그래! 유원지! 쇼핑 끝나고 유원지라던지, 가보는 건 어때? 응?"

말을 내뱉는 순간, 나는 키시의 표정이 사르르 풀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붉은 색의 눈이 '반짝'하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하는 정도로 빛나는 것도.

와—이거 다른 쪽으로 위험한 거 아냐? 하는 의문을 뒤늦게야 가졌을 때는 이미 키시가 잔뜩 들떠서 핸드폰의 진동을 부웅부웅 울려대고 있었다. 얼마나 진동을 울려대는지 손이 저릴 정도였다.

 [진짜지? 정말이지 주인님! 방금 유원지, 간다고 분명 이야기한 거지? 그치?!]

실언이었다고 말한다면 지금이야말로 대폭발할 것 같은 텐션이다.

 "어, 응……. 그, 그래."
 [약속한거다! 우와! 일단 나 롤러코스터 타고 싶어! 또, 또…!]

분명 자신이 직접 타지 못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들떠서 놀이기구를 잔뜩 늘어놓는 키시를 보며 깨달았다. 아, 이 녀석. 이 녀석도 바깥세상에 놀라고 있었구나. 게다가 나처럼 더위나 냄새같은 걸 느낄 수 없는만큼 더더욱 바깥세상이 놀랍고 매력적이라고 느끼고 있을 터였다.

뭐, 어쩔 수 없나. 예상보다 더 신이 나서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키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앞으로 다시 나오리라는 보장은 없는데 오늘만큼은 제대로 서포트 해줘야겠다. 그렇게 다짐했다.

*

 "그런데 아까 그 직원, 왜 처음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던 걸까?"

엘레베이터를 기다릴 즈음, 작은 의문에 중얼거렸다. 내 목소리가 작은 게 문제였던 건가—하고 태평하게 고민하고 있었더니 뭔가 머뭇거리는 눈치를 보이던 키시가 파일을 뒤적거려 웬 녹음파일 하나를 틀었다.

 ' 저, 저어기이…. 죄송합니다아……. 컴퓨터 용품 코너느은 어디에 있나요오…?'

기분 나쁘게 웅얼웅얼거리는 여자의 목소리. 굉장히 낯익은 게 다름아닌 내 목소리다. 그 다음에는 명백하게 당혹스러워하는 맑은 남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그 녹음파일은 끝. 그걸 조용히 듣고 있던 나는 무심코 신음을 흘렸다.


 "으, 으으……."
 [이런 느낌이니까 아무래도 곤란해할만하지 않나싶은데.]
 "우와아, 절규하고 싶어졌어……."
 [아니 뭐, 나야 익숙하니까 괜찮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조금 난이도가 높지 않을까 싶어.]
 "그만 둬…. 이제 돌아갈래……."

안 돼! 그럼 유원지는! 하고 소리치는 키시를 힘 없이 쳐다보았다. 죽고 싶다. 나름 상큼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시궁창. 그나저나 너는 삐진 그 와중에도 그걸 녹음하고 있었던 거냐.

 "그래, 죽자."
 [주인님,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제 눈 앞에 컴퓨터 용품 코너가 있다고!]

키시의 말에 문득 정신을 차리자 온갖 마우스나 키보드 같은 용품들이 널려있는 층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성실한 몸뚱아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제 멋대로 움직인 모양이다.

 "조, 좋아. 그럼 파바박 사고 돌아가자."
 [주인님! 유원지 잊으면 안 돼!]
 "아아…, 알았다고……."

잊고 싶어도 네가 하도 떠들어대서 잊을 수도 없어. 그렇게 투덜거리며 안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순간이었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커다란 폭음이, 헤드폰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내 귀에 전달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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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ze(4)

[카게프로]Haze 2016. 12. 9. 21:22


계속해서 유원지에 가자는 키시 녀석의 칭얼거림을 애써 무시하며 겨우 도착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우, 우오오오오오…….

 "생각보다 더 크잖아, 이거."
 [아무래도 백화점 느낌이니까. 안 들어갈거야, 주인님?]
 "도, 돌아가면 안 될까."

유리로 되어있는 문과 벽을 통해 보인 1층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저 사이를 뚫고 지나가라고? 난 못해. 나와 사람들은 분명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쌍의 눈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여, 역시 이런 건 무리야. 나는 돌아가야겠어. 몸을 빙글 돌려 다시 돌아가려는 찰나 한심함과 단호함이 동시에 담긴 키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지금 돌아간다면 주인님은 최소 3일동안 게임을 하지 못한채로 있어야한다고? 그래도 좋아?]
 "적어도 여기에서 죽는 것보단 집에서 죽을래……."
 [아—그러면 죽어가는 주인님 앞에서 나 혼자 게임을 해도 되겠네!]

나는 컨트롤러가 전혀 필요 없으니까 말이야! 키시는 그렇게 말을 끝맺으면서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어째 익숙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고 보면 가끔 키시녀석에게 익숙한 후배녀석의 모습이 보일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너는 고문을 할 셈이냐. 입가를 씰룩이며 분한 표정으로 키시를 노려보았더니 기분 나쁜 코웃음만이 돌아왔다. 결국 나는 한숨을 푹 쉬며 건물 안으로 떨리는 두 다리를 내딛을 수 밖에 없었다.

건물 안은 에어컨으로 인해 시원하다 못해 서늘했다. 급격한 온도 변화로 인해 적응하지 못한 피부가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내 머리 속은 하얗게 점멸되어 깜빡였다. 식은땀이 줄줄 흘려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지, 아니야. 이 정도로 정신을 잃으면 안 되지. 나는 고개를 세게 휘저으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를 썼다. 겨우 떨리는 다리를 다잡고 고개를 들자 헤드폰을 타고 어쩐지 흐뭇한 키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에, 의외인데.]
 "뭐가?"
 [아니야—주인님 화이팅이라고.]

뭐냐, 그거. 뭔가 허무한 키시의 응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본 백화점의 내부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만큼 넓었다. 새로 연 것이 티가 팍팍 나는 하얀 벽 위에는 '올해 가장  최첨단 시스템의 방호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안심하고 쇼핑을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적혀있는 종이가 잔뜩 붙어있었다. 폰을 손에 들고 있는 탓에 그 문구를 읽은 키시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이거, 내년이 되면 지워지는 걸까?]
 "…이상한 곳에서 날카롭구나, 너. 뭐, 내년에는 내년의 방호벽을 깔겠지."
 [흐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문구를 곱씹는 키시를 내버려두고 컴퓨터 용품 코너를 찾기 위해 나는 눈길을 돌렸다. 도저히 못 찾겠다.

 "아, 알고보면 여기에 컴퓨터 용품 코너가 없다던가?!"
 [……그럴리가 없잖아, 주인님. 주위에서 표지판을 찾던지 물어보라고.]

아, 그런 수가 있구나. 좋은 수를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내가 발견한 것은 다름아닌 뚱한 표정의 키시였다.

 "뭐야, 너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뭘.]
 "…아니, 뭔가 기분이 안 좋아보여서……. 설마 유원지 때문이냐?!"
 [가고 싶다고, 유원지!]
 "하지만 너 가보았자 탈 수 있는 것도 없잖아!"
 [—아, 정말 이젠 됐어! 주인님은 바보야!]

뭔지 모를 외침과 함께 핸드폰의 화면이 뚝 꺼졌다. 뭐야,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이 녀석이 화를 내는 영문을 모르겠다.

 "하아, 일단 이 녀석은 한동안 나오지 않을 것 같고…."

나는 일단 컴퓨터 용품 코너를 누구든지 좀 물어볼까.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은 역시 점원이었다. 여기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니 누구보다도 위치를 잘 알 것이다. 친절하게 방긋방긋 웃으며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점원들 중 꽤 멋있게 생긴 남자점원에게 다가갔다.

 "저, 저기이…. 죄송합니다……. 컴퓨터 용품 코너는 어디에 있나요오…?"

필살 미소를 지으며 물었더니 한순간 곤란한 표정을 짓던 남자직원은 곧 "아아, 컴퓨터 용품이요!" 다시끔 친절한 웃음을 띄며 위치를 알려주었다. 우선 인사를 꾸벅, 하고 그가 알려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런 나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성공했어! 오랜만에 키시가 아닌 남자와 이야기 나누기 성공했다고! 키시 녀석에게 자랑하고 싶었지만 녀석은 어째 아직도 반응이 없었다. 아직도 삐져있는 거냐, 이 자식. 의외로 쪼잔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그만 화 좀 풀라고. 왜 화났는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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ミ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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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ze(3)

[카게프로]Haze 2016. 12. 9. 21:21

 "……."
 […….]

결론만 말하자면 소생은 실패했다. 고전분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참한 패배의 현장의 모습에 키시와 나는 침묵했다.

 "이제 어쩔거냐……."
 [어, 주인님. 이거 이동은 안 되도 공격은 되는데.]
 "쓸모 없잖아, 그거…."

아무리 움직여도 캐릭터를 조종하지 못하는 게임기의 조이스틱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마우스는 아예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와아, 아주 망했어요. …이젠 싫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절망하던 나는 문득 화면에서 뭔가 부지런히 움직이며 이것저것 창을 띄우는 키시를 발견했다.

 "…뭐하는 거야?"
 [—읏, 그, 그게.]

본의는 아니었으니까, 하고 답지 않게 우물쭈물거리는 키시가 띄워논 것은 다름아닌 게임기와 마우스들의 향연이었다. 키시 주제에 반성이라도 하는 건가, 하고 생각하는 와중이었다.

 [주인님.]
 "응?"
 [……하나도, 없어.]
 "하? 무, 무슨 뜻이야?"
 [당일 배송이 하나도 없어.]
 "뭣? 거짓말이지? 아니, 잠, 왜?!"
 [내일이 오봉연휴라서…. 아무리 빨라도 내일 모레 배송이야.]
 "자, 잘 찾아보면 적어도 하나 쯤은—!"

삐이—, 하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면 가득 붉은 가위표가 떠올랐다. 허허, 이렇게 망하는구나. 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허탈하게 웃었다. 누가 뭐라 해도 게임은 내 인생의 낙이자 삶인 것이다. 그런데 그 게임을 할 수 있는 매개체가 사라졌다는 건 나보고 살지 말라고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단 말이지. 실룩거리는 입가를 애써 제어한 나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키시 이 망할 자식아아아—!!"
 [미, 미안해!]

*

나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길거리를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내딛었다. 손에는 언제 샀었는지도 모를 낡은 터치패널식 핸드폰이 들려있는 상태였다. 2년 동안 꺼내지 않았던지라 먼지가 잔뜩 껴있는 것을 나가기 전에 키시가 잘도 발견했다. 귀에 쓴 헤드폰을 타고 쾌활한 키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이 쪽 골목에서 오른 쪽이야!]
 "아아, 알았어."

2년 만에 나온 거리는 굉장히 낯설어서 마치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것만 같은 기분을 선사했다. 아마 현재 내 핸드폰에서 네비게이션 역할을 하고 있는 키시가 아니었다면 금세 길을 잃어버렸을 것 같을 정도였다. 참고로 히키니트인 데다가 커뮤장애가 심한 내가 이 더워 죽겠는 길거리로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자, 지금이야 주인님! 어서 나가! 나가서 사오는 거야!>
 '에, 에에에?!'
 <이젠 이 방법밖엔 없어! 자, 가자!>
 '아, 아니, 잠깐만!'

키시의 밑도 끝도 없는 재촉에 얼떨결에 전에 자주 입었던 파란 저지와 치마바지를 꺼내 갈아입고 나서 그대로 외출하게 되었다. 할머니가 왠일로 바깥에 다 나가냐고 놀라시면서도 내심 흐뭇해 하시던 게 떠올라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라, 근데 원래 여기에 이런 게 있었던가?"
 [1년 전에 만들어진 건물이라던데? 주인님이 모르는 게 당연하지.]
"하아, 그런가. 그나저나 무지 덥네……."
 [올해 최고 폭염이라서 벌써 열 댓명 정도 실려나갔다는 뉴스 기사가 있어.]
 "거 참 고마운 소식이구나! 이야, 희망차다 젠장!"

성질을 내며 화면을 슬쩍 바라보았더니 키시는 얄밉게도 선풍기를 쬐며 뒹굴거리고 있었다. 더위도 타지 않는 녀석이 이러는 이유는 날 약 올리기 위해서겠지. 아무튼간에 망할 녀석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땡볕의 육교 계단 오르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극심한 고문일 것이다.

 [주인님, 숨소리 기분 나빠.]
 "시끄러워! 애초에 너만 아니었어도 바깥에 나오지도 않았어!"

괜히 짜증이 일어서 버럭 소리치며 흐르는 땀을 훔쳐냈다. 아아, 2년 간 시원한 방 안에서만 머물다가 나왔더니 더 더운 것 같아. 그러니까 말하자면 체감온도가 한 50°는 되는 것 같다는 걸까.

 [고지가 바로 눈 앞에 있어요— 힘내라, 힘내라—]
 "눈 앞은 개뿔……. 어디로 가야 돼?"
 [육교에서 내려와서 좌회전해서 쭉 가면 횡단보도가 하나 나오는데, 그거 건너면 돼.]

육교에서 내려온 나는 키시 녀석이 말한 신호등을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서 신호등을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나저나 멀어…. 저기까지 어느 세월에 걸어가냐.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으로 떨어져 색깔을 진하게 물들이는 땀방울의 향연은 여전했다.

 [주인님, 그렇게 더우면 차라리 그 긴팔 저지를 벗는 건 어때?]
 "싫어."
 [쓸데 없이 단호하시네.]

단박에 거절했더니 키시가 조그맣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헤드폰 한 구석에서 웅얼웅얼 흘러들어왔다. 그 소리를 무시하며 나는 간신히 도착한 횡단보도 앞에 섰다. 반대편의 붉은 빛을 띄고 있는 신호등이 아지랑이로 인해 아른아른거렸다. 덥다덥다 했더니 아지랑이까지 생겨먹은 모양이다. 하긴, 아지랑이가 생겨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날씨다. 빌어먹도록 덥다.

그런 생각이나 하며 신호등이 바뀌는 걸 기다릴 즈음, 이상하게 키시가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수다쟁이가 갑자기 왜 이러지, 하는 불안감으로 화면을 내려다보았더니 녀석은 그 붉은 눈을 뭔지 모를 기대감으로 잔뜩 반짝거리며 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인님, 주인님.]
 "무, 뭐야?"
 [오늘 우리가 가는 건물 옥상에 유원지가 있대!]

뭔가 이거 필이 좋지 않다. 직감적으로 느낀 나는 떨떠름하게 키시의 말을 잘랐다.

 "안 돼."
 [에엑!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뻔하잖아! 유원지는 안 돼!"
 [에에— 왜요 주인니이이임! 유원지 가자! 가 보고 싶단 말이야!]

애교 부리지 마! 애초에 2년 동안 집 안에서만 쳐박혀있던 나란 히키코모리에게 유원지는 너무 진입 장벽이 높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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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ze(2)

[카게프로]Haze 2016. 12. 9. 21:20
나는 한숨을 쉬며 아직도 이불에 파묻혀 있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컴퓨터 의자에 앉았다. 이왕 일찍 일어난 김에 게임이나 해야겠다. 물론 하루종일 하는 일과가 밥 먹고 게임하고 자고 일어나서 다시 밥 먹고 게임하고 자고, 이런 식으로 무한반복이긴 하지만. 이 시간 때에 할머니가 깨어있으실리는 만무하니 평소와는 달리 게임부터 일상을 시작해야겠다. 이게 전부 키시 녀석 때문이다.

게임이 부팅되면서 흥겨운 멜로디와 총소리가 나름 음질 좋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본래 썼던 스피커는 이렇게 좋지 않았지만 몇 주 전, 키시 녀석이 내 카드번호를 가지고 제 멋대로 인터넷에서 주문시켜버린 물건이다. 그 때는 화를 냈었는데 가격 대비 꽤 좋은 물건이라 이젠 나도 애용하고 있다. 물론 키시에게 사과도 했다.

게임 계정에 접속하는 동안 키시 역시 더블 계정 시스템으로 같이 접속했다. 로딩이 되는 사이 컴퓨터에 게임기를 설치하며 나는 투덜거렸다.

 "애초에 네 놈이랑 게임은 너무 불리해. 넌 프로그램 그 자체잖아!"
 [치졸한 변명인 거 아려나 몰라? 주인님이 약한 거라니까. 안 그래, '섬광의 무녀 에네' 님?]
 "으갸아라앍아악!!"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오 세상에 맙소사. 그 옛날 닉네임을 어떻게 아는 거냐. 나는 분명히 이 녀석에게 알려준 기억이 없었다. 키시를 만난 건 그 게임을 접고 난 후였을 텐데?

어떻게 아는 거냐고 다그쳐 물었더니 그냥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알았단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가 머리를 팔 사이로 집어넣으며 붙잡자 키시가 상큼하게 웃었다.

 [있지, 주인님.]
 "또 뭐야…. 이미 내 HP는 제로라고……."
 [어라, 그럼 이걸 보면 마이너스가 되는 걸까?]

이, 이건 또 무슨 소리냐. 단박에 고개가 치켜올려졌다. 떨리는 눈길로 화면을 응시했더니 키시가 정말 햇살보다 더 밝은 미소로 무언가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 저건……!

 "내, 내 닉네임 마음대로 바꾸지 마아아아아아아!!"

분명 굉장히 정상적이던 내 닉네임이 '섬광의 무녀: 에네'로 바뀌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비명을 지르며 모니터를 콱 붙잡았다. 아니, 그보다 이거 닉네임 바꾸려면 분명 거금 250 엔이나 주고 닉네임 변환권을 사야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으아아, 이 원수야! 또 내 카드 썼냐!"
 [네♡]
 "—————!!"
 [어라, 주인님. 사람 말을 하라고. 하나도 못 알아 먹겠어.]

아아, 이젠 틀렸다. 재기불능의 상태까지 오고 만 것이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마우스를 몇 번 딸깍거려 캐릭터 창을 불러왔다. 화려한 전적창과 함께 옛날 내가 썼던 중이스러운 닉네임이 떡하니 박혀있었다.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괴로워하던 나는 곧 분을 못 이기고 컴퓨터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너 말이야! 저번에는 겨우 풀 세트로 맞춘 장비를 멋대로 헐값에 팔아버리질 않나, 게다가 게임만 하면 내가 아군이던지 적군이던지 항상 나부터 죽이고!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거냐!"

그러니까 말하자면 피를 토할 정도로 억울했다. 내가 키시에게 무엇을 잘못했나 고민을 해 보아도 도무지 생각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내가 울분을 토하자 키시 녀석은 '난 죄가 없어요'라는 순진한 표정으로 능청스럽게 공중에서 만들어낸 콜라캔을 들이키고 있었다. 프로그램 주제에 콜라 맛은 알고 마시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것보다.

 "딴청 피우지 마!"
 [에헤이— 주인님, 텐션 너무 높다.]
 "그러니까 그건 너 때문이라니까! 왜 내가 제멋대로 열받아하는 것처럼 말하는 거냐고, 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다 성질에 못 이겨 책상을 한 번 더 내리쳤다. 그리고 그게 문제였다. 무슨 소리인가하면, 어제 키시 녀석의 강요 아닌 강요로 마지못해 몇 모금 마셔서 반 이상 남은 콜라캔이 엎어져 마우스와 게임기를 흠뻑 적셔버리고 만 것이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빠르게 스며들어가는 검은색 설탕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키시가 전에 없던 다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휴지! 그렇게 멍 때리고 있을거야?!]
 "아, 그, 그렇지!"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휴지를 왕창 뽑아 콜라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제발 살아나 주세요, 마우스 님! 아니 무엇보다 게임기 니이이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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