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나비'를 받고 간단하게 연성해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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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봄, 꽃에 나비가 날아들 듯 나는 너에게 날아들었다.
*
첫 만남은 다시는 떠올리기 싫을 만큼 최악이었다. 비틀거리던 발걸음, 잔뜩 술에 취해 어렴풋한 시야, 그에 반해 어느 때보다도 들떴던 기분. 무엇이 문제였을까, 고민해보자면 사실 이 모든 것들이 문제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무엇이 문제였냐면 완전히 초면인 네 품으로 뛰어들었던 내가 제일 문제였다. 남자친구였던 놈을 걷어차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그 놈의 욕을 마구 퍼붓다가 나와선, 히히덕거리며 길거리를 걷다가 널 보곤 그냥 네 품 속으로 달려가버린 내가.
그 때의 난 도대체 어떤 정신으로 네게 안긴걸까. 아직도 제대로 기억난다. 명백하게 당황하고 곤혹스러워하던 너의 표정.
네 얼굴을 보고 나서야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차가워지는 이성으로 황급히 떨어져 잔뜩 꼬인 발음으로 꾸벅꾸벅 사과를 건네는 내게 너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 저기. 괜찮아요?”
첫 질문부터 배려심이 뚝뚝 흘러넘치는 너의 첫마디에 내 눈물도 뚝뚝 흘러넘쳤다. 아니, 사실은 그 반응이 매우 정상적이고 당연하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전 남자가 너무 쓰레기였기에 그런 당연한 반응이 너무 고맙고 서글펐다.
급기야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나에게 너는 어찌 했더라. 안타깝게도 그건 기억이 나질 않는다. 눈물이 터짐과 동시에 술에 잔뜩 절여진 뇌가 필름을 뚝 끊어버린 탓이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땐 이미 집이었다. 너의 모습을 안개 속 넘어로 간신히 떠올린 나는 창백해져 우선 내 몸가짐과 짐들을 확인해보았다. 어제 입고 널부러져 잔 탓인지 마구 구겨진 정장과 딱 택시비만큼 돈이 사라진 자신의 지갑. 그리고 급하게 편의점에서 산 모양인지 완전히 빳빳한 노란 포스트잇 쪽지가 한 장.
‘집을 알기 위해서 잠시 신분증 좀 봤어요, 미안. 일부러 여자 택시기사님 불렀으니까 무사히 들어갔다고 여기로 한 마디만 해줘요.’
연락처도 아니고, 이메일 주소가 적힌 쪽지를 보며 괜스레 웃음이 터져나왔다. 참 된 사람이다, 그게 멀쩡한 정신을 찾은 내가 가장 먼저 든 소감이었다.
“푸훗, 푸하핫,”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그리고 눈물도. 당신같은 사람이 내 애인이었다면 지금 나는 이렇게 마음이 아프진 않았을텐데. 웃음과 울음을 같이 터뜨린 나는 한동안 메마른 집 안에서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
두 번째 만남은 의외로 금방이었다. 이메일로 안부를 전하고 난 뒤, 그것을 인연으로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 받다가 둘 다 다시 얼굴을 보자고 약속을 한 탓이었다.
평소보다 더 공을 들여 머리를 꾸미고, 화장을 하고 난 뒤 두근거리는 마음을 끌어안고 만나기로 한 카페에 미리 가서 앉아있었다. 너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발견하고 싶어서, 일부러 유리벽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나는 순간 눈을 일그러뜨렸다.
그 놈이랑 눈을 마주친 탓이었다. 내 남자친구를 자처하던 미친 쓰레기놈. 그 녀석도 날 발견한 모양인지 히죽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이게 누구야, 도도하고 도도하신 내 여자친구분이 아니신가.”
“난 너랑 할 말 없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즐겁게 뛰어오르던 심장이 차갑게 식어내렸다.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커피만 마시는 내 모습에 놈은 열이 뻗쳤는지 뭐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다가 내 멱살을 휘어잡았다.
“뭐하는거야!”
“뭐하긴, 내 여친 놈 기강 잡지.”
미쳤다 미쳤다 했더니 정말로 정신이 나간건지 얼굴이 새빨개져 씩씩거리는 놈의 얼굴에 침을 뱉어줄까 하다가 나는 순간 표정이 희게 질렸다. 네가 내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앞에서 침을 튀기도록 뭐라뭐라 열변을 토하는 것은 들리지도 않았다. 너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유리벽 넘어에서 나와 놈을 바라보고 있었다.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너의 모습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참 남자운도 없지. 이딴 쓰레기 때문에 좋은 사람처럼 보이던 너를 이렇게 놓치게 되다니. 이런 내게 네가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여전히 내 멱살을 잡고 있던 놈의 팔목을 강하게 부여잡는 너의 팔에 깜짝 놀랐다.
부예진 시야 사이로 단단히 화가 난 듯 입가를 굳게 다물며 놈을 노려보는 네가 보였다.
“뭐, 뭐야?”
“뭐하시는 겁니까?”
잠시 당황하던 놈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턱짓했다. 제 3자가 상관하지 말고 저리로 가란 뜻이었을까. 그러나 너는 놈의 기대를 무시해버린 채 우선 내 멱살에 붙은 놈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지금 뭐하시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시발, 니놈이 신경 쓸 일이 아니잖아!”
“신경 쓸 일입니다. 그 쪽 여자분, 오늘 제가 만나기로 했거든요.”
너는 한 마디도 지지 않은 채 강하게 맞섰다. 몇 번이고 말에 밀리던 놈은 마치 최후의 보루마냥 당당하게 나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이 년은 내 여친이라고!”
정말 한심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눈물이 쏙 들어간 눈을 들자 그래서 어쩌라는 듯한 표정을 지은 네가 보였다. 그런 표정에 힘 입어 나 역시 입꼬리를 차게 올렸다.
“정확히는 ‘전’ 여자친구겠지.”
“뭐?”
“너, 차였잖아. 몇 주전에. 나한테. 아주 처절하게.”
가랑이 사이까지 차였지, 아마. 비아냥거리는 내 말투에 가뜩이나 시뻘겋던 네 얼굴이 마치 활화산마냥 달아올랐다. 내게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듯한 네 모습에 너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피식 웃어보였다.
“집착하는 사람이 제일 매력없다던데. 알아요?”
“어머, 그러게요. 저 사람, 멍청해서 그런 거 모르거든요.”
말을 끝내는 순간, 놈은 내게 주먹을 날렸다. 결국 참지 못한 걸까.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얼굴을 보호하던 나는 아픔이 찾아오지 않자 의아한 마음에 빼곰 눈을 들었다.
보이는 광경은 놀라웠다. 나름 순하게 보였던 네가 놈의 팔을 잡아 힘으로 저지한 것이다. 전 여자친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놈의 무식한 힘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던 나는 무척 놀라 널 올려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비웃듯 조금 올라가있던 입매는 마치 처음처럼 굳게 다물려있었다.
잠시 당황하는 놈과 자신의 손에 잡힌 놈의 팔을 번갈아 보던 너의 입에서는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마냥 낮디 낮은 저음이 신음마냥 새어나왔다.
“...내 여자야. 어딜 손을 대려고 해?”
“뭐, 뭐? 무슨 개소리야!”
“네가 놓친 이 좋은 사람, 내가 데려간다고. 어딜 손을 대려고 해?”
경찰 불러서 하나하나 파묻어 버리기 전에, 당장 꺼져. 위협하는 목소리로 이를 가는 너의 모습에 놈은 다음에 부고보자, 라는 흔한 말을 던지고는 꽁무니 빼게 도망가버렸다.
이제야 밀려오는 부끄러움과 긴장감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좋아하던 카페였는데, 다시는 오지 못할 것 같다. 완전히 쭈그려 앉아 얼굴을 숨기고 있던 나를 바라보던 너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괜찮아요?”
그 때와 대사도 같았다. 이 미묘한 데자뷰에 괜스레 터져나오는 헛웃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나를 너는 어찌 보고 있을까.
“...괜찮으니까, 얼굴 보여주세요. 다친 곳은 없어요?”
부드럽게 말하며 내 옆에 같이 앉는 너의 행동에 나는 고개를 들면서도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다시피, 괜찮아요. 힘 없이 내뱉어진 내 말에 그저 날 도닥이던 너는 문득 무엇을 떠올린 건지 당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아, 아니. 아까 제 멋대로 제 여자라고 말했는데... 기,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잔뜩 얼굴이 빨개져 급하게 말을 잇는 너의 모습에 이번에는 유쾌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어쩜 사람이 이렇게 간사할까. 너의 모습 하나만으로 이렇게 행동해졌다. 나는 작게 눈웃음을 지으며 너의 손을 덥썩 잡았다.
“우리, 그걸 실제로 만들어보는 건 어때요?”
“네, 네?”
“사귀고 싶어요, 당신이랑.”
잠시 침묵하던 너는 아까의 호승심 어린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누구보다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는 나비는 너라는 꽃에게 그렇게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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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 ミネ
그림쟁이 인 척 하는 평범한 잡덕 글쟁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