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불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가게 안.
가게 한 쪽에서 우당탕탕, 커다란 소음이 울려퍼졌다. 원인은 다름아닌 구석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던 손님 두명. 아무래도 신입인 듯 단골들이 몰리는 이 가게에서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싸우는 내용을 들어보자하니 한쪽이 다른 상대방의 보스를 모욕한 모양이었다. 보통 마피아들이라면 많이 싸우는 이유 중 하나였으나, 가게에 앉아있던 손님들ㅡ주로 단골들ㅡ은 일제히 얼굴을 부여잡거나 슬금슬금 가게를 빠져나갔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제 곧 폭풍이 몰아치리라...!
검은 줄무늬의 하얀 귀가 쫑끗 움직였다. 딸깍, 하고 조금은 낡은 곰방대가 바 테이블(bar table) 안 쪽에 고이 놓여졌다. 나른한 반눈을 접고 여유롭게 앉아 담배를 피고 있던 소년 같은 청년은 긴 꽁지머리를 흩날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휘익ㅡ
"??!!!"
오프너를 집어던졌다. 볼에 붉은 실선을 긋고 지나가 벽에 꼿꼿하게 박히는 오프너를 보며 흠칫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것은 화사하게 웃으며 살기를 내뿜는 청년.
"애송이들아, 선배들에게 듣지 못했나?"
여기서 세력 싸움같은 걸 하면 죽는다고. 평소에는 분명 듣기 좋은 테너였을 테지만 현재는 마왕이라도 강림할 것 마냥 서슬 퍼런 목소리에 그들은 바들바들 떨었다. 그랬다. 분명 자신의 상사들에게 들었다. 이 곳은 분명 어느 곳보다도 술 맛도 좋고 정보도 질이 좋은 것들이 많지만 전쟁의 연장선(그것이 사소한 말다툼일지라도)을 끌고 간다면,
"응? 왜 대답을 하지 않는가."
이 곳의 주인인 청년ㅡ백호, 마츠노 카라마츠에 의해 반쯤 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신입들의 비명소리가 가게를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
신입들을 응징하고 밖으로 내쫒아버린 후 카라마츠는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까의 살기는 어디로 갔는지 나른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담뱃대를 집어드는 그를 보며 여태껏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토도마츠는 픽 웃었다.
"아무튼간에, 살벌하다니까 형은."
"나는 내 가게에서 난리치는 녀석들을 쫒아낸 기억밖에는 없는데."
후, 허공에 담배연기를 가늘게 피워올리는 카라마츠는 긴 앞머리에 가려지지 않은 왼쪽 눈으로 토도마츠를 힐끔 바라보았다. 네네, 그러시겠죠. 못말린다는 듯 웃은 토도마츠는 다시 핸드폰으로 주의를 돌렸다. 그런 그를 무미건조한 눈으로 바라보던 카라마츠는 아무런 말 없이 토도마츠의 빈 칵테일 잔을 치웠다.
"그래서, 놀러온 건 아닐테고...무슨 볼일이냐, 애송아."
"그 애송이라는 호칭, 어떻게 안 돼?"
"아들이라 불러주랴?"
"......농담도 참.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농담하는 버릇 좀 어떻게 해줘."
"그보다, 용건."
방금건 농담이 아니었을지도. 속으로 중얼거리며 카라마츠는 투덜거리는 토도마츠를 직시했다. 토도마츠는 특유의 오리입을 삐죽거리며 지금껏 만지고 있던 스마트폰을 흔들거렸다.
"형 가게에는 정보가 많이 모이니까, 그걸 수집하러 왔을 뿐이야."
"왠만하면 사라. 돈 없다."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그도 그럴것이 카라마츠의 바(bar)는 꽤 유명한 곳이다. 중립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싸움이 일어날만 하건만, 결코 일어나지 않아서(랄까, 일어날 수가 없다.) 마음 편히 지낼수 있을 뿐더러 술 맛도 좋고 판매되는 정보의 질도 쓸만하다. 그런데 돈이 없을리가. 거짓말쟁이!! 소리 높여 외치며 밉지 않게 눈을 흘기는 토도마츠에게 그는 그저 픽 웃어주었다.
어쩐지 얄미운 마음에 무언가를 말하려던 순간 토도마츠의 토끼귀가 쫑긋 곤두섰다. 그런 그를 보며 카라마츠는 답지 않게 한숨을 푹 쉬었다. 올 때가 된건가. 그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방금 와인 코르크를 따기 위해 집어들었던 오프너를 문 쪽을 향해 집어던지는 것과 문이 벌컥 열리는 것은 동시였다.
"야호-! 카리스마 레전드 장남님이 왔....으앗?!!"
미간으로 날아드는 오프너를 간신히 피한 청년-오소마츠는 잔뜩 울상이 되어 카라마츠를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혀를 찼다.
"피했나."
"와, 내 취급 너무하지 않아?! 분명 너무하지?!"
"시끄럽다."
"아빠 너무해!"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아빠가 이 세상에 어디있어!! 떼 쓰듯 외치는 그를 향해 카라마츠는 비웃음을 날렸다. 누가 네 아빠냐. 방금 전까지 토도마츠에게 아들 운운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가운 반응에 오소마츠는 입을 삐쭉이며 토도마츠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구는 카라쨩 보고 싶어서 일 열심히 하다 왔는데, 죽이려고나 들고. 너무하네 정말!"
"오소마츠 형, 그래봤자 땡땡이지?"
여유롭게 카라마츠가 리필해 준 칵테일을 홀짝거리던 토도마츠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스마트폰의 화면을 비추며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면에 떠 있는 것은 쵸로마츠와의 단독 메세지. 쵸로마츠의 메세지 글자 하나하나에서 분노가 뚝뚝 묻어나는 것을 보며 오소마츠는 방긋 웃었다. 아, 벌써 들켰어? 난 죽었네.
허탈하다는 듯 웃는 오소마츠를 보며 한숨을 삼킨 카라마츠는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결국 항상 쵸로마츠의 손에 질질 끌려가는 결과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저 아이는 왜 항상 도망쳐나오는지. 물론 이유야 예상은 가지만 제발 쵸로마츠의 속을 그만 썩였으면 좋겠다. 하면 하는 녀석인 걸 아는데 왜 하질 않나. 모든 고민과 한숨을 가득 담아 오소마츠 쪽을 향해 담배 연기를 불었다.
갑작스런 담배연기에 놀란 랫서팬더 특유의 두터운 꼬리가 붕붕 흔들렸다. 콜록콜록 기침을 하는 그에게 날아든 것은 다름아닌 새하얀 줄무늬 꼬리. 순식간에 카라마츠에게 얻어맞은 오소마츠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문 쪽을 응시했다.
쾅-!!
"썩을 보스 이 새끼, 어디 있어!!!"
거칠게 문이 열리고 등장한 것은 다름아닌 오소마츠의 오른팔이자 언더보스인 쵸로마츠였다. 꽤 빨리 왔네, 하며 손을 흔드는 토도마츠를 무시한 그는 성큼성큼 분노에 찬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역시나 오소마츠의 앞.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는 오소마츠의 멱살을 잡은 쵸로마츠의 초록빛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내가 그렇게 탈주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 말이 말같지도 않냐...? 내 뿔에 그렇게 찔리고 싶어?"
"아하하, 쵸로쨩? 이, 일단 진정하고..."
"진정? 진저엉?! 이 망할 장남이, 그게 니가 할 말이냐? 앙?!"
형아 목 나갈 것 같, 살려줘!! 오소마츠의 비명이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도저히 사그라들지를 못하는 쵸로마츠의 분노에 결국 카라마츠가 중재를 나섰다.
"일단 진정하거라. 그러다가 죽는다."
몇 분동안 토닥임을 받은 쵸로마츠가 그제야 제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가 머리에 열이 좀 많이 올라서."
"...나는 괜찮다만, 애송이는 안 괜찮아보이는군."
헤롱헤롱 생과 사를 해매는 오소마츠를 힐끔 보며 카라마츠는 혀를 찼다. 나는 널 그렇게 약하게 키운 기억이 없는데.
"죄송했습니다. 이 빌어먹을 놈..., 아니 실례. 스승님 앞에서 이런 천박한 말을. 어쨌던 저희 보스는 무사히 데려가겠습니다."
카라마츠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면서도 손으로는 확실하게 오소마츠의 멱살을 틀어쥐는 쵸로마츠의 모습에 토도마츠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간에 카라마츠 형 앞에서는 온갖 내숭 다 떨지. 물론 그를 포함한 다섯 쌍둥이 전부 카라마츠에게 꽤나 내숭을 부리는 편이지만 쵸로마츠는 조금 더 나아가 평소에는 그렇게 말이 험한 사람이 카라마츠 앞에만 서면 인물이 바뀐다. 와, 처음 봤을 때는 이중인격인 줄 알았다니까.
질질 끌려나가는 오소마츠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토도마츠는 마치 체인지하듯 가게로 들어서는 두 명의 형을 발견했다. 다름 아닌 이치마츠와 쥬시마츠다.
언제나처럼 자신의 검은 고양이 귀와 꼬리색과는 대조적인 새하얀 양복을 입은 이치마츠와 분명 검은 양복임에도 불구하고 발랄하게 보이는 쥬시마츠. 카라마츠는 황갈색의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자신에게 돌격하는 쥬시마츠를 슬쩍 피하면서 팔을 내밀어 벽에 쳐박히려는 그를 능숙하게 잡아냈다.
"와하핫, 또 벽에 박을 뻔 했다!! 고맙슴다, 형아!!"
"일단 돌격을 멈추면 어떨까, 쥬시마츠 형..."
중얼거리는 토도마츠를 웃으며 지나치는 쥬시마츠를 본 카라마츠는 짧게 혀를 차며 이치마츠에게 눈을 돌렸다. 흰 페도라를 손가락으로 휙휙 돌리던 그는 픽 웃으며 입에 물린 시가를 우물거렸다.
"타지 않는 쓰레기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입버릇. 고치랬지."
"사실을 말한 것 뿐인데."
낄낄거리는 이치마츠를 보며 카라마츠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토럭 성실하고 순하던 아이가 어째서 저렇게 큰것인지. 솔직히 말하자면 꽤 초기에는 자신의 육아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게 아닐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었다.
아니, 어쨌던간에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카라마츠는 손에 들고 있던 곰방대를 내려놓고 이치마츠에게 다가갔다. 카라마츠가 가까이 오면 올 수록 미묘하게 눈을 동그랗게 뜨는 이치마츠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치마츠의 바로 앞까지 근접한 그는 오른 손을 뻗었다.
"읏...!"
"뭘 겁내나?"
자신의 얼굴을 항해 뻗어오는 카라마츠의 손에 순간 눈을 질끈 감았던 이치마츠는 웃음기 어린 그의 목소리에 빼꼼 눈을 떴다. 그런 그의 눈 앞에는 픽 웃으며 자신의 입에 물려있던 시가를 어느새 빼앗아 자신의 입에 물은 카라마츠가. 시가연기를 잠시 입에 머금었던 카라마츠는 후, 하고 이치마츠의 얼굴에 내뱉었다.
"우왓, 콜록, 뭐하는거야?!"
"내가 담배 그만 피랬지 애송아."
그것도 이렇게 독한 걸. 혀를 쯧쯧 찬 카라마츠는 손에 들린 시가를 그대로 손가락으로 튕겨내버렸다. 정확하게 담배털이에 떨어진 시가는 조욭히 붉은 빛을 몇 번 더 토해내다가 곧 사그라들었다.
어쩐지 멍한 표정인 이치마츠를 재치고 카라마츠는 다시 자신의 곰방대를 집어들었다. 붉은 색과 푸른색이 절묘하게 섞인 술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ㅡ그래서, 오늘은 어땠느냐?"
그의 금갈빛 눈이 날카롭게, 그러나 애정을 품고 미소를 지었다.